설교문포함)2020.08.23 사명 그 이후, 피의 정체성을 가져라 (출 4: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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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울제일 작성일20-08-22 16:25 조회1,005회 댓글0건본문
1. 사명자로 떠나는 모세
18절에 모세는 그의 장인에게 애굽으로 돌아간다고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모세의 말속에는 하나님을 만난 그 영광어린 말이 배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래서 19절에 최종적으로 모세의 근심을 없애줍니다. 너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다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끝까지 모세를 달래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여줍니다.(애굽 왕 자료 사진)
모세는 드디어 20절에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모세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애굽이라는 강대국과 싸우기 위해,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구출하기 위해 출발하는 모습치고는 너무나 빈약합니다. 영화에 보면, 적진에 들어가는 자는 기관총을 들고 탄티를 X자로 두르고 수류탄을 허리에 찹니다. 머리에는 띠를 둘러서 비장한 결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모세는 어떠합니까? 멋있는 적토마 말이 아니라 나귀를 끌고 갑니다. 비룡검이나 총, 아니 칼이나 화살도 없습니다. 그저 지팡이 하나 달랑 들고 갑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래가 허파가 뒤집혀서 죽었습니다. 그 이유는 멸치가 결혼하자고 청혼했기 때문입니다. 코끼리가 기가 막혀 죽었습니다. 개미 두마리가 코끼리 등위에 올라타서 코끼리를 먹겠다고 했습니다. 개미 한마리는 떨어지면서 하는 말이 “안되겠다. 너는 목졸라라. 나는 발로 넘길께!” 이 말을 들은 코끼리가 기가 차서 기막혀 죽었다고 합니다. 코끼리 앞의 개미, 고래 앞의 멸치 같은 모습이 지금 모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무엇을 들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있습니다. 마른 막대기 같지만 하나님이 같이하시면 모세는 큰 능력을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세의 이런 열등의식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중국에 가면 열등의식이 듭니다. 땅도 작고 인구도 작습니다. 우리나라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합니다. 자기 나라 땅을 이렇게 몇 키로다 몇 리다 계산한 나라가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작으니까 어지간하면 거기다 대자를 갖다 붙여야 됩니다. 한강에 있는 다리는 무조건 대교입니다. 한강대교 성수대교 잠실대교. 여러분 미국 샌프라시스코의 금문대교? 그런 것 보셨습니까? 그 어머어머한 다리도 그냥 금문교지 금문대교라고 하지 않습니다. 동양에서 제일 아름답다던 원나라 때의 노구교, 노구대교라 했습니까? 우리나라 이름이 뭡니까? 대한민국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월드컵 응원할 때 보면 대~한민국이라고 대자에 엑센트를 붙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열등의식을 가질 필요 없습니다. 자금성 가면 사람들이 와, 우리나라 경복궁은 쨉도 안되네라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런 말을 합니다. 왜 잽도 안돼요?! 우리나라가 더 아기자기하고 사실 더 커요. 우리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이것 다 합치면 대단합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과소평가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너무 작게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는 모든 장치를 미리 다 해 놓으시는 것입니다. 할 수 있도록 만들고 나서 하라고 합니다. 누가 자기 능력 믿고 하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 믿고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쳐다보면 안 됩니다. 우리는 안 될 존재니까요. 문제를 바라보면 안 되지요. 문제가 너무 커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라보고 문제를 보면 문제가 문제 같습니까? 무엇을 바라보느냐의 문제입니다. 시각의 문제입니다. 어떤 것을 바라보느냐! 바라보는 것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문제를 바라보면 문제에 눌려 사는 인생이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뭐든지 다 됩니다.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은혜가 역사하면 안 될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그러니까 이 땅을 살면서 멋지게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10년 단위로 명확한 사명 하나 붙들고 그것을 하나씩 이루어가면 됩니다. 10년쯤 한 우물 파면 뭐도 안되겠습니까? 바로 그거입니다.)
드디어 모세는 갑니다. 얼마나 지체하고, 머뭇거리고, 질질 끄는 연약한 모세입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모세가 나중에는 확 변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경험하면 달라집니다. 변합니다.
출애굽기 14장을 보시면 모세의 변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열가지 재앙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바로는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보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탈출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홍해 바다로 인도하십니다. 뒤에서는 말을 타고 다가닥 애굽병사가 쳐들어 옵니다. 앞은 시퍼른 물이 출렁이며 홍해 바다가 가로 막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아우성을 칩니다.
“애굽에서 죽게 내버려 두지 왜 여기까지 끌고 와서 수장을 시키느냐”
이때쯤되면 모세가 어떻게 나오리라고 여겨집니까? 여태껏 우리가 본 바에 의하면 모세가 뭐라고 반응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미투,미스리, 낱 오울리 이스라엘 -벗 오올소우 모세. 그래 맞다. 하나님 와이카십니까요. 진짜 이 카십니까?” 이렇게 맞장구를 쳐야 정상아닙니까?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14장 13-14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읍시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너는 가만히 있거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는 가를 보고만 있으라. 저기 애굽 군대 보이지. 다시는 못보게 만들어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늘 너희들을 위하여 싸울거다. 가만히 있어라.” ---(지난 주 본문에 하나님 뵈옵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린 모세가 나중 두 번째 시내산에 와서는 어떻게 합니까? 출34:33,34- 정반대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만날 때 수건벗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봅니다. 오히려 사람 앞에서 수건을 씁니다(뿔 사진..). 모세가 그렇게 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할 수 있으니까 부르시는 것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있습니다. 그런 자신감으로 나아가십시오. 우리교회, 우리기업, 우리자녀가 세계 최고라고 생각하세요. 비록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지팡이만 있으면 족하다 되었다. 이런 사명 가지고 자기 인생에 불을 붙이십시오. 2020, 비록 코로나로 기억되는 인생이지만, 우리교회는 그리고 여러분, 오히려 사명을 받는 인생, 사명에 불이 붙어있는 인생, 그런 해가 되길 바랍니다.
2. 애굽으로 들어가는 모세에게 힘을 주는 하나님
사명자로 모세는 나아가니다. 그런데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재미있는 것은 미리 말하면 모세가 안간다할까봐 출발할 때 말합니다^^.
21절입니다. 완악하게, 완강하게 하나님이 하셨더라에 대한 해석- 완악하게(17번). 주어가 바로일 때 있고, 하나님일 때 있습니다(6번째 재앙이후로 주어는 하나님) 이것은 완악한 바로를 완악하게 내버려두셨다는 말입니다. 신학적으로, 내버려두심, 좀 더 유식하게, “유기”.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사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내버려두셨다는 뜻입니다.
본문 22절-23절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힘을 줍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장자로 아들로 묘사하면서 애굽의 장자들은 오히려 죽인다고 하십니다.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섬기게 하라” 바로왕에게 이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그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나의 아들들이고 내 장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듣고 모세는 담대히 출발을 합니다.
그러나, 24절 이후에 가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하는 사건입니다. 읽습니다. 이 사건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민족의 지도자인 모세를 왜 죽일려고 했을까요? 가지 않을려고 한 모세를 하나님이 억지로 불러놓고선 왜 죽일려고 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진짜 죽일려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괜히 겁주기 위해서 모세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보통 “까불면 죽인다” 했을 때 진짜 죽이겠다는 말보다는 괜히 겁주기 위해 씁니다. 그러나 23절의 경우를 볼 때 하나님은 모세를 반드시 죽인다고 했습니다.
참, 황당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제 겨우 마음먹고 순종하려는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죽이시려 하시니까요... 이런 문제는 인간의 생각으론 풀이가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하잖습니까? 인간의 생각으로는 어쩜! 이러실 수가!... 라고 할만 하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큰 뜻이 숨어있습니다.
3. 사명자 모세에게 필수적인 것을 원하는 하나님
여러분은 이 본문을 스스로 한번 풀어보셨습니까? 호락호락하지 않는 본문입니다. 몇 가지 물어볼까요?
여기서 할례를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물론 모세 아들이죠! 그럼 두 아들 다 할례를 받았습니까? 아니면 한 아들입니까? 그리고 왜 할례를 하지 않았을까요? 할례 안한 것은 모세 때문입니까? 부인 십보라 때문입니까? 십보라가 피남편이라 한 것은 신앙고백입니까, 불평입니까? 이 사건이후 십보라와 아들은 어떻게 됩니까? 같이 갔을까요? 아니면 같이 가지 않았을까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난제 중의 난제입니다.
1) 왜 모세는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을까요?
먼저 모세의 두 아들 모두에게 할례를 행해야 합니까? 아니면 둘째 아들에게만 행해야 합니까? 자, 먼저 기본적인 것부터 물어봅시다. 모세는 할례를 했을까요, 안했을까요? 당연히 했겠죠. 그의 어머니가 직접 키웠으니 분명히 할례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 첫째 아들은 요? 첫째 아들 이름이 무엇입니까? 게르솜, 둘째 아들은 요? 엘리에셀입니다. 어떤 분들은 둘 다 할례를 안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본문 20절에 보면, “아들들”이라 했습니다. “아내와 그의 아들들을 나귀에 태웠”다고 했는데, 나귀가 단수형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게르솜은 어느 정도 성장하여 걸어서 가고, 엘리에셀은 갓난아이였을 것이다. 엘리에셀은 바로의 칼에서 구원했다, 하나님의 도움이라고 이름 지은 걸로 봐서는 애굽으로 가기 얼마 전에 아이를 낳았을 듯 합니다. 엘리에셀은 십보라가 안고 나귀에 앉혀서 갔을 가능성입니다.
본문에 25절에 할례를 급하게 행한 아들은 단수형입니다.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었다고 했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게르솜에게 할례 행했다고 하지만, 첫째 아들은 이미 할례를 한 것입니다. 둘째 아들입니다.
2) 할례를 안한 것은 누구 책임일까요? 모세 일까요? 십보라 일까요?
그럼 둘째 아들 할례 안한 것은 누구 책임일까요? 모세일까요? 십보라일까요? 4주 뒤에 보겠습니다! 이렇게하면 좋겠지만 일반적으로 부부 문제는 5:5입니다. 학자들마다 해석이 완전히 다릅니다마는 저는 반반으로 봅니다.
첫 번째 십보라 책임론을 봅시다.
예전에는 십보라가 남편을 잘 받든 대표적 여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여전도회 헌신예배 때 칭송을 받는 여인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엔 십보라를 비판하는 쪽으로 성경해석이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해석의 키이는 출18장 2-3절 때문입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보낸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의 두 아들을 데리고 왔으니”
여러분,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겠지만, 이 사건 이후로 십보라와 그의 두 아들이 같이 애굽으로 가지 않고 미디안 광야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사건에 십보라가 어느 정도 원인 제공이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십보라가 아들 할례로 인하여 안정을 취하는 차원에서 돌아갔는지, 할례를 통하여 언약의 자손이란 표를 안고 안심하고 돌아갔는지 모르겠지만 돌아간 것만은 사실입니다. 요즘 십보라가 모세에게 피남편이라 한 것을 신앙고백 차원이 아니라 불평이나 불만 차원에서 했을 수도 있다는 해석이 제기됩니다. 즉, ‘피남편’을 '자식의 피를 흘리게 만든 사람'이라는 원망과 빈정거림으로 보는 의견이 있기도 합니다.
모세의 아내는 미디안적 배경, 특히 미디안 제사장의 딸로서 할례에 대해서 반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아들에 대해서는 할례를 인정했지만 아들이 피를 흘리며 고통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둘째 아들에게는 극렬하게 반대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남성 비전트립 중에 개봉에서 만난 유대인 여자도 이미 할례니 예배니 그런 것은 다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유대인으로 키울 자신 없어서 자녀를 낳지 않겠다고 합니다. 사실 그는 유대인 아니무니다!!
그러나, 모세 책임론이 더 큽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치시려고 했던 것으로 보아 모세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에겐 할례의 표시가 있었습니다. 물론 애굽 궁정에서 살다보니 애굽 왕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히브리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디안광야로 도피하면서부터 그의 정체성의 혼란이 시작됩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모세를 처음 만나서 한 말, 즉 이집트인을 만났다는 말 속에서(출2:19) 모세의 정체성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히브리인도 아니고 이집트인도 아닌 어정쩡한 가운데 40년 동안 미디안 제사장인 장인어른의 양떼나 돌보는 머슴같은 사위가 되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어째어째 할례를 행했습니다. 이미 자신에게 할례의 흔적이 있었고 그것에 대해서 십보라에게 설명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는 이방인 제사장의 딸인 아내의 눈을 의식해 감히 할례를 행하지 못했습니다. 할례의 흔적은 자신이 히브리인임에 대해 확신도 긍지도 없고 그저 감추고 싶은 창피한 흉터였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모세가 처음에는 하나님 자녀의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 처가살이 하다보니 특히 이방 문화에 젖어 살다보니 이런 정체성의 혼란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도자는 이런 기본적 정체성을 갖지 못하면 절대 안됩니다.(군대안갔다온 사람을 국군통수권자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그런 것입니다. 국세청장 뽑는데 탈세했다, 교육부장관 뽑는데 논문표절했다... 안되는 것입니다. 그 정체성을 보는 것입니다.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단순한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지도자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기본이 뭡니까? 하나님 백성을 확인하는 표식이 무엇입니까? 바로 할례입니다.
3. 제자도의 교훈과 적용 (제자는, 사명자는??)
1)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
십보라의 피남편 교훈을 봅시다.
십보라에 대한 비판적 의견도 있지만, 본문에 보면 어쨌든 십보라의 결단으로 인해 모세가 살았고 그의 가족이 살았습니다. 십보라에 대한 긍정적인 교훈을 살펴 봅니다.
십보라는 벌써부터 할례에 대해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생식기가 좀 달랐잖습니까? 부부이니 자연스럽게 물어 보았을 것이고 모세는 자기 민족의 신앙에 대해 설명하면서 할례의 유래를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십보라는 지혜로운 여인이라 이 할례의 문제를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길래 순간 하나님의 뜻을 간파할 수가 있었겠지요? 처음에는 할례를 쉽게 생각해서 자신이 할례를 반대했을 수도 있지만 늦게나마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즉시 답을 찾았고 행동에 옮겼습니다. 손에 돌맹이를 쥐고 아들의 포피를 찍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여인입니다! 피가 철철 흐르고 극심한 고통이 그 어머니와 아들에게 덮쳐왔습니다. 그리고 십보라 모자는 남편과 아버지인 모세의 민족에게로, 세상과 구별된 길을 걷는 히브리인들의 하나님께로 들어왔습니다. 약속의 민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할례를 통하여 피언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면 가까운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좋은 믿음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모세가 결단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 아내 십보라의 결단으로 모세가 살고 히브리 민족이 살게 되었습니다. 서로의 믿음과 정체성을 바로 세워주기 위해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J형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한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가족들은 모두 피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피 부부, 피 아들, 피 어머니로 맺어져야 합니다. 또한 피 친구, 피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즉,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맺어진 사이임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천국 백성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성찬 포도주의 의미)
모든 직분자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체성을 삼아야 합니다. 피목사, 피장로, 피권사, 피집사가 되십시오. 피교사, 피찬양대원이 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들, 오늘 이 본문은 하나님의 약속아래 살아가는 성도가 근본적으로 무엇을 깨달고 살아가야 하는 지를 잘 보여 줍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보혈의 피 의미를 깨달으시고, 주님의 피로 우리는 새롭게 되었음을 고백하시고 모두가 주님의 피의 언약으로 관계를 맺어가시길 바랍니다.
* 발에 갖다대는 것은 살을 던지는 것도 되지만, 그 피를 던지는 것도 됨. 그 피를 통하여 구원의 백성임을 확인.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것을 상징하는 것도 있음. 22절-23절이 그것을 상징함. 모세에게 언약의 후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설명하기 위해 24절 사건을 일으킴. 네 백성의 구원도 이와같음. 문설주에 피를 바름으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할례를 다 행하게 했을 것이다.
22절-23절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장자로 아들로 묘사하면서 애굽의 장자들은 오히려 죽인다고 하십니다.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섬기게 하라” 바로왕에게 이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네가 지금 붙잡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주어 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라! 는 말씀이십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나? 하면 그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나의 아들들이고 내 장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네가 결국은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 아들을 위하여 네 아들을 죽이고, 내 장자를 위하여 네 장자를 죽이겠다"는 말씀이 나중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2) 늘 피의 정체성을 확인하라
어쨌든 아내의 문제까지도 포함하여 그의 모호한 정체성을 하나님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셨습니다. 정체가 모호하면 사명을 받았지만 죽을 수도 있습니다. “니가 하나님의 백성 히브리인이냐? 그렇다면 너의 아들에게 왜 할례를 하지 않느냐?...”
아내의 고집을 꺽지 못하고 엉거주춤 지도자의 길로 나서고 있는 모세, 하나님 백성으로써의 정체성 혼란 상태에 있는 모세를 하나님은 사명자로 보내실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애굽의 바로와 대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배웠을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이 사건을 통해 진정한 히브리인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거침없이 나가는 위대한 믿음의 영웅으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한 자기청산, 자기 회개, 자기 성결의 문제를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순종하려면 먼저 성결하십시오. 회개하십시오. 그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할례"가 무엇이냐? "너는 하나님의 씨다, 하나님의 백성이다"란 말입니다. 지금 모세는 할례문제로 범죄한 것입니다. 왜 이런 순간에 꼭 할례를 행해야 합니까? 애굽으로 가는 마당입니다. 갈 길이 멉니다. 할례하면 가족들이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왜 요단강을 건너자 마자 할례를 합니까? 전쟁을 앞두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총 칼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이 대장되시고 하나님이 친히 이끄시는 영적 전쟁, 거룩한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이 담보되어야 합니다. 할례란 ‘언약의 표시를 몸에 지니는 것’입니다. 할례에는 이런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나의 아들은 나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피를 흘림으로, 피부 일부를 자름으로 너와 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된다’는 신앙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할례는 구별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세상 사람과 다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인간 모세로 하나님 앞에 서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인간 지도자를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사자인 모세를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없어도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모세는 하나님의 언약 테두리 안에서만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새역사를 쓰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조건이 필요합니다. 무조건 하나님 믿는다고 축복주고 능력주는 것 아닙니다. 최소한 하나님 자녀의 표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언약의 자녀,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이 지팡이를 인간적으로 쓰지 않고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 반석 두 번 두드린 사건이 큰 문제가 된 것이 그 때문입니다. 모세는 즉 나는 하나님의 종이다 도구다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구별된 사람입니다. 피 남편입니다. 나는 주님의 피로 산 아들입니다. 피로 난 아내입니다. 피로 산 교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산 아버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산 어머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큰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모세에게 그것을 원하셨습니다. 너는 무엇보다 나의 자녀 나의 백성임을 잊어버리면 안된다, 기독교인 교사, 기독교인 기업가, 기둑교인 정치가, 기독교인 주부, 기독교인 가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절대 믿고 따라가는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 자녀라는 구별, 나는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 이것이 필요합니다.
3) 결론
정체성을 회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관계를 맺으십시오.
어정쩡하게 살아가선 안됩니다. 우리는 어차피 애굽을 떠났습니다. 애굽은 우리가 살 곳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미디안 양치기로서 그저 살 것입니까? 하나님 지팡이나 만지면서 과거를 후회하면서 살아갈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우리 모두 주님의 보혈의 피 의미를 깨달으시고, 주님의 피로 우리는 새롭게 되었음을 고백하시고 모두가 주님의 피의 언약으로 관계를 맺어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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