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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의 신비(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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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동춘 작성일21-05-02 09:56 조회5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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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요한복음을 강해합니다. 먼저 사도요한은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신 제자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를 맡기고 부탁할 정도로 친밀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서양사람들 이름에는 요한의 이름이 많습니다. 미국에서 이 요한입니다. 독일에서는 한스‘, 러시아에서 이반‘, 프랑스에는 이 요한입니다. 쟝발장 할 때 이 요한입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하고 특별히 다른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세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는 예수의 생애를 시간순으로 기록하여 같은 관점으로 본 복음서라고해서,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공관복음서에 없는 내용을 중심으로 새로 추가한 내용이 많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90프로 이상이 다른 복음서에 없는 기록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공생애가 몇 년이라고 알고 있습니까? 3년으로 보죠. 왜 그렇습니까? 바로 요한복음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한 번 올라간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세 번 올라간 것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3년 이상의 공생애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특별히 예수님의 신성을 중심으로 기록하여 다른 복음서와 구별됩니다. 그 이유를 많은 학자들은 추측하기를 사도 요한은 사도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면서 아마 3가지 복음서를 다 읽어 본 후 그 중 예수님의 일생 중 특별한 것만을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요한이 강조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신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 아들은 하나님 본체라는 것을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7가지 표적과 7가지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7가지 표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7가지 구조인데, “나는 ...이다7번 나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구약 어디에 나옵니까? 불타는 가시덤불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이 자신을 표현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이 표현은 결국 예수님이 그런 신적인 분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시작하는 오늘 1장도 그렇습니다. 타 복음서는 처음 시작할 때 예수님이 태어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요한복음은 갑자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은 시작부터 아기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신성을 먼저 드러냅니다.

태초라는 말은 세상 시작 전부터 인데 창1:1절에 나오는 태초에라는 말과는 다릅니다. 성경 제일 처음에 나오는 창 1:1절 뭐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의 태초란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이고, 요한복음의 태초는 천지창조전보다 더욱 근본적인 때를 말합니다.

 

1. “말씀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 태초에 말씀이 계신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인격체로 사용되었습니다. 2절에 말씀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가 무엇입니까? ‘입니다. 이것은 말씀이 하나의 인격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말씀은 무엇일까요? ,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말씀과 라는 표현을 예수님으로 해 놓고 읽어보면 아주 해석이 잘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1-4절에 있는 말씀이란 말과 라는 말을 예수님으로 바꾸어서 한 번 읽어 볼까요?

<태초에 예수님이 계시니라. 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예수님 없이는 된 것이 없느리라.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여기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이 땅에 태어나신 분이 성인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계셨던 하나님과 동등한 인격체라는 사실입니다. 그 분은 태초에 하나님으로 계셨다가 이제 때가 되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라고 바로 말하지 않고 말씀이라고 했을까요? 태초에 계신 분을 인간의 이름 예수로 소개하면 조금 이상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어떤 적절한 이름을 붙여야 했습니다. 구약 다니엘서에도 다니엘이 환상 중에 그리스도를 보았는데 그 이름을 붙이기 애매해서 인자 같은 이, 사람 같은 형상을 가진 어떤 분으로 묘사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 분을 말씀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많고 많은 단어 중에 말씀이라고 했을까요? 태초에 말씀이 계신다는 것은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말씀이 인격체가 아닌데 태초에 떠돌아다닌 그 무엇이 있었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사실 저는 번역이 문제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은 원어(헬라어)로고스인데 이 로고스라는 단어를 중보자’ ‘그리스도로 번역했으면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 “태초에 중보자인 그리스도가 계시니라이해가 쉬울 뻔 했습니다. 아니면 아예 로고스그대로 해도 괜찮습니다. “태초에 로고스가 계시니라왜 로고스가 괜찮냐하면요, 당시에 로고스란 말 속에 굉장한 뜻이 담겨 있었거든요.

 

2. “로고스의 신비 - 죽은 플라톤이 산 나를 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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