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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웃은 안녕하십니까?(선한 사마리안인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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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동춘 작성일21-03-13 17:39 조회632회 댓글0건

본문

            < 당신의 이웃은 안녕하십니까? >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 본 문 * 눅 10:25-37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선한사마리아인은 요즘 불신자들도 많이 압니다. 선한사마리아인 병원이 있고 단체가 있습니다. 심지어 이 비유를 빗대어 ‘나쁜 사마리아인’이라는 책도 나왔습니다.
  이 비유가 촉발된 계기는 예수님과 율법교사와의 대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 자기 삶에 자신 있는 율법사
  25절 보면,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의 주어는 누구입니까? ‘율법교사’입니다. 율법교사는 밤낮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으로 밥을 먹고 살 정도로 율법에 정통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신학대학원 교수입니다. 그런데 이가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자기들은 이미 답을 다 알고 시험을 치는 것입니다. 그 답에서 벗어나면 틀린 것입니다. 학생들이 질문하는데 미리 답을 알고 선생님에게 테스트해 보기 위해 질문하는 것과 같습니다. 속이 터질 노릇입니다.
  질문의 키이워드는 무엇입니까? ‘영생’입니다. 율법교사는 자신이 영생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저 예수가 뭐라 말하는지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에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몇인칭입니까? 1인칭입니다. 율법사는 심중에 “내가” 영생을 얻는 방법, 알고 있다. 자신있다 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아마 그는 율법교사니까 율법을 잘지키는 것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확신 속에 예수를 시험하며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사실 영생을 어떻게 얻습니까? 물건입니까? 영생은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누구를 믿음으로요? 예,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 학자는 틀린 것이어요. 예수님은 만약 이 율법교사가 진지하게 접근했더라면 영생의 비밀을 소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영생을 얻었다고 자신하고 교만하게 시험하는 것을 아시니, 예수님은 오히려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거꾸로 그를 테스트합니다. “그래, 너는 뭐라고 생각하느냐, 율법에는 뭐라고 되어 있더냐?

  2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러자 율법교사는 아마 신나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율법의 박사인 자기에게 율법을 묻다니, 바로 대답합니다.

  27절“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렇지요? 율법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아닙니까?
  아마 예수님께 칭찬을 듣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미소를 띠고 눈을 감고, 아 칭찬소리 듣겠구나! 그런데 그때 예수님은 핵심을 찌릅니다. ‘그래 그러면 아는 바대로 행해 봐라. 그러면 영생얻어!’

  2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일반적으로 어떻습니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온전하게 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런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특히 하나님 사랑에 자신있는 사람 구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한다고 누가 자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이쯤되면 ‘예수님, 와, 너무 부족합니다. 혹시 제가 영생을 얻는 방법이 있을가요?“ 라고 엎드려야 정상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율법교사는 순응하지 않습니다.
  속이 뜨끔하니까 화제를 바꿉니다. 자신이 잘하는 분야로 슬쩍 넘깁니다. 아마도 하나님사랑은 부족해도 이웃사랑은 자신있다는 듯이 예수님께 또 질문합니다.

2. 진정으로 자기를 돌아보지 못한 율법사
  예수님,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질문은 무엇입니까? 적어도 이웃사랑은 자신있다는 것입니다. 29절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말 속에는 율법사의 얍삽한 마음이 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 속에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자신의 의를 드러내 보이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은 이웃이 누구인지 알고 있고, 또 그 이웃에 대하여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옆에 있는 사람” “옆 집의 사람” “친구” “친척들” 아닙니까? 이렇게 상식적인 것을 이 사람이 예수님께 물어보는 것은 무슨 의도일까요? 그 앞에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자신은 이웃을 사랑한다고 자신만만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이웃이 누구다, 그러면... 제가 사랑하는데요~ 또 누구다, 그러면... 아, 예수님, 제가 얼마나 사랑했는데요~ 라고 답변하려고 만만의 준비를 했을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이웃은 ”네 친척이다“ ”네 민족이다“ 그러면 아마,”예, 예수님 내가 율법을 열심히 가르치고 섬겼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당하여 구제도 했습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뜻밖으로 그 이웃이 누군가를 답하지 않고 한 비유를 드십니다. 어떤 비유입니까?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안인'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왜 비유를 드셨을까요? 결국 이 율법사는 이웃에 대해여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잘못 알고 있습니다. '당체 네가 네 꼬라지를 모르고 있다. 바로 대답해도 알지 못하는 너에게 꼬여있는’ 생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는, 이웃에 대한 기본 개념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느니라~~ 그래서 비유를 들었습니다.
  먼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웃이 누구이냐? 너 중심의 이웃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예화에서 나온 결론은 무엇입니까? 이웃은 상대방에게 이웃이 되어 줄 때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강도만난 자에게 진정한 이웃은 사마라인입니다. 동족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닙니다.
  결국 이웃이 누구냐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이웃이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이웃은 옆에 있다고 이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줘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교우들이 이웃입니까? 아닙니다. 이웃이 되어 줄 때 이웃입니다. 이웃이 장례를 당했는데 모른척했다. 이웃이 아닙니다. 기도부탁을 받았는데 모른척했다. 이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가족이라고 다 이웃이 아닙니다. 이웃이 되어 주십시오.
  좀 더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3.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1) 강도만난 자에 대한 제사장과 레위인의 태도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이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자리를 피해서 갔습니다. 아마 이들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 급한 제사를 지내는데 더 중요한 일을 하기 때문에, 더구나 시체를 만지면 제사 지낼 때 부정하게 될까봐 이들은 지나 간 것입니다. 본문에 '거의 죽었다' 예전 성경에 ‘거반 죽었다’는 것은 이미 죽은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아마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성전 봉사자야! 시체의 2미터 이내로 접근하면 안돼. 혹시 접근했다가 시체를 만지게 되면 격리해야 돼. 아이고 귀찮아.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성전 제사야. 지금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 나를 기다리고 있잖아!"
  꼭 모든 나쁜 일을 하는 논리 속에는 큰 뜻으로 위장합니다. 다른 대의를 이용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사마리아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33절입니다.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 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지금 누가 등장하고 있습니까? 사마라아인입니다. 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켰을가요? 지금 이웃을 돌보야 하는 자는 율법교사입니다. 율법교사는 이 비유에서 누구를 대비합니까? 예,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못 본 척 지나갔습니다. 그에 비해 사마리아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특별히 유대인 농부나 목자가 아니라 사마리아인을 등장시켰을까요?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율법사는 이때 어떤 반응이었을까요? 아마 깜짝 놀라며 얼굴이 울거락 불거락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에서 사마리아를 선하게 착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마라아인의 비유"입니다. 당시 이 비유를 듣고 있는 제자나 사람들도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 더욱 불쾌했을 것입니다. 귀에 대단히 거슬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묵상한 건데요. 지난 주 본문 바로 앞(눅9:52)에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의 마을로 들어가려 했었는데 그들이 예수님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너무나 분하여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제자들은 그 사마리아인이 선하다고 하니까 미치고 환장할 지경입니다.
  선하다와 사마리아인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안인은 나쁘다고 여겼습니다. 사마리아는 앗시라아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에 특별히 혼혈 정책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잡종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멸시하였습니다. 나라가 망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는데 같은 동족끼리 비난하는 것입니다. 청나라때 환향녀와 같습니다. 이태원이란 뜻 아십니까? 임진왜란때 이태원 위 절에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여승들을 겁탈하였습니다. 첩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거기서 태가 다른 곳이라해서 이태원이라 쓰다가, 나중 배나무 이를 사용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이 바로 그런 멸시를 받았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선한"이라는 단어는 절대 갖다 붙일 수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공개적으로 사마리아인들을 저주했으며, 매일 저들을 지옥불로 심판해야 한다고 공개기도를 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율법교사들은, 거지들도 사마리아인에게만은 동냥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군중의 테러 위협도 불사하는 용기를 발휘하고 계신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백인들의 집회장에서 흑인 편을 드는 것이나 치열한 전쟁터에서 적군 편을 드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조선시대로 치면 정통 유학자 앞에 너는 공자를 저 백정보다 더 모른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어떤 유대인이 다른 유대인을 도와준 이야기를 하셨다면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달갑게 들었을 것입니다. 혹은 한 유대인이 곤란에 처한 어떤 사마리아인을 도와준다는 이야기였더라도 그런 대로 참아 줄 만한 이야기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2) 강도만난 자에 대한 사마리아인의 태도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유대이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33절 끝에 나오는 “불쌍히 여겨”라는 단어는 영어로는 컴패션 입니다. 컴은 함께 하는 뜻이고 패션은 고통 또는 아픔이란 뜻이 있다. 영한사전에는 동정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동정이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영어의 참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확히 번역하면, ‘그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으로 동참하여’가 좋습니다.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예수님은 이야기의 장면 장면마다 사랑의 의무를 저버린 제사장 레위인의 행동과, 사랑을 실천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너무도 두드러지게 대조하여 묘사하셨습니다.
  제사장들, 레위인의 마음은 차갑고 계산적이었지만 사마리아인의 마음은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도 분명히 기름과 포도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름과 포도주는 나중에 성전 예식 집례 때 써야한다는 구실로 그대로 짐꾸러미 속에 남아 있었으나, 사마리아인의 기름과 포도주는 강도 만난 이의 상처를 치료하는 진통제와 살균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쓰러져 있는 사람이 시체일 것이라고 미리 여겨 재빨리 달아나기 위하여 그대로 말에 타고 있다가 지나쳤을 거지만, 사마리아인은 용감하게 짐승에서 내려 부상자를 자신의 짐승 안장에 태운 채 자신은 걸어갔을 겁니다. 그들은 돈이 있었지만 하나님께 헌금해야 한다고 지갑을 만지막거리며 채 가버렸으나, 사마리아인은 부상당한 이가 완전히 회복하는 데 필요한 간호비용으로 꼬박 한 달치 임금 또는 그 이상의 돈도 아낌없이 내주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강도만난 자를 만나면 119만 쳐놓고 기다리거나 그들이 오면 맡기고 가버려도 됩니다. 그리고 자신은 여행 중에 지금 너무나 피곤합니다. 자신도 기름과 포도주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그들을 진심으로 돌보았습니다. 자신의 기름과 포도주를 아낌없이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말에 태워 주막에 맡겼습니다. 아마 자기는 걸어갔을 겁니다.
  그리고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당시에 두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이틀 일당(마20:2)입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15만원-20만원되는 돈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숙박비는 대략 1/32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돈으로 약 3000원됩니다. 결국 이 돈은 당시 한 달의 숙박비가 훨씬 넘는 돈이었습니다. 그리고도 더 부족하면 어떻게 한다고 하고 갔습니까? "내가 갚으리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카드가 있어서 현금이 없어도 되지만 당시에는 현금이 떨어지면 바로 굶어야 합니다. 아마 이 사마리아인은 그 비용 때문에 자신은 굶거나 곤란을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이 어느 종족인지 거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이 모든 일을 했다는 점입니다. 사실 당한 것으로 보면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에게 더 많이 당했습니다. 사실 사마리아인 입장에서도 유대인이 대단히 싫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을 자신들이 좋아할 리 없지요? 오늘 본문 앞 구절이 그것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강도만난 유대인을 보고 오히려 "고놈 잘됐다. 고소하다"며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마라아인은 민족과 종족을 불문하고 강도만난 그 아픔에 동참하며 사랑을 베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출신이나 신분, 민족을 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강도 만난 그 급박한 환경 만을 보았습니다.
  
4. 이웃이 누구인가?->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 
 
  예수님은 이 정도 이야기를 하고서 다시 율법사에게 질문합니다. 율법사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겁니다.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무엇입니까? 뭔가 통쾌한 것이 느껴집니까? 사마리아인이 이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율법사의 입에서 자신이 그렇게 싫어하는 사마리아인이 이웃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이라고 여겨지 않았던 사마라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습니다.
  물론 37절에 보니 이 율법교사는 아직 자존심을 부리고 있습니다.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라는 질문에, "사마리아인입니다!" 이렇게 해도 될 것을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모기소리 만하게 했을 거여요. 사마리아 인이라고는 차마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경멸하는 사마리아인이 선하다고 입에 올리기는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점으로 돌아가 봅시다. 율법사의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눅10:29) 였습니다.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한마디로 뭐였습니까?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10:36)입니다.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이 이웃의 고정관념을 깨뜨립니다. 전혀 예상치 않은 이웃을 제시하며 깨뜨립니다.
  지금 율법사의 관심은 "나의 이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강도만난 자의 이웃"입니다. 결국 이웃의 개념은 내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이웃이 다 내 중심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여러분들에게 내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의 이웃을 가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 중심이면 내가 바쁘면, 내가 다른 중요한 일을 하면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강도만난 자를 만나면 우선순위가 바로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이웃이 되겠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웃이 되겠느냐, 이웃이 되었느냐는 말입니다. 누가 너의 이웃으로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는 이웃이 되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웃에 있다고 다 이웃이 아닙니다. 가족이라고 다 가족이 아닙니다. 가족의 아픔과 상처를 보다듬어 줄 수 있을 때 이웃입니다.(코콜이...)
  기독교의 이웃은 사랑이 전제되는 이웃입니다. 사랑이 투입되는 이웃입니다. 여러분들의 지체들과 이웃이 되었습니까? 친척들과 이웃이 되겠습니까? 친구들과 이웃이 되었습니까? 옆 집 사람들과 이웃이 되었습니까? 북한동포와 이웃이 되었습니까? 일본인(일본인선교사 파송될 때 어느 권사님의 기도), 중국인과 이웃이 되겠습니까? 저는 요즘 미얀마가 밟힙니다. 미얀마 적십자에서 미얀마사태 때 부상당한 이를 위한 모금운동을 하는데, 동참해 주고 싶습니다. 이번 부활절 헌금 일부라도 나누고 싶은데 여러분 뜻은 어떻습니까? 미얀마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까?
  여러분, 예배 드리러올 때 누가 비틀거리는 겁니다. 잡아주어야 합니다. 때로는 119불러줘야 합니다. 저의 탈북자 사역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ㅡ꽃제비.목욕 옷재워주는 것 (예전 어느 신문에 목회자와 스님들의 족구 시합이 무산되었다고 합니다. 기독교 어느 단체에서 반대했어요. 뭐가 문제입니까?)
  이웃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이웃을 만들어가고 있습니까? 그냥 내 중심으로 자연적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만들어가는 이웃, 상대방 중심의 이웃, 이것이 주님이 오늘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이 여러분과 이웃이 되어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뻔 했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이웃으로 너무나 자격 없는 사람이 아닙니까? 강도만난 자처럼 비참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이웃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 땅에 와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이웃이 되게 하기 위하여 아니, 우리를 친구가,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주먹으로 맞고, 채찍으로 맞고, 침뱉음을 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물과 피를 쏟고 죽으셨습니다.
  이번에 설교 후 부를 찬송을 찾는데 감짝 놀랐습니다. "날 위하여 날 위하여"(통일426장)가 개편찬송가에 빠졌습니다. 저는 예전 그 찬송을 참 좋아했습니다. 거기에 보면 "형님같이 대신하여 중한 고통당했네"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데 보면, 동생이 맞고 있을 때 형님이 뛰어들잖아요. "형, 안돼 형" "아니야 너는 가, 빨리 가란 말이야" 형은 울면서 악당을 막아서며 말하고, 동생은 울면서 도망가고, 형은 대신 얻어맞고 죽는 그런 이야기 아시지요?  우리가 세상에, 죄에게, 죽음에게 포로로 잡혀서 협박당하고, 마귀에게 이리저리 팔려 다니고, 세상에 맞고 있을 때 주님이 형님같이 뛰어 든 것입니다.
  "빨리 가, 동춘아, 내가 맞을게. 내가 당할게. 너는 빨리 가. 걱정말고 가" “퍽, 퍽, 윽, 윽” 주님은 내 대신 맞고 맞고 침뱉음을 당하고, 칼에 푹푹 찔려 장렬히 돌아가신 것입니다. 주님은 물에 빠져가는 나를 밖으로 건져내 던지고 물에 빠져 대신 돌아가신 것입니다. 불에 타들어가는 나를 건져내시고 대신 불에 타서 죽은 것과 같습니다. 강도 만나 다죽어가는 아니, 이미 죽었던 우리를 아무 댓가없이 차료하시고 케어하시고 대신 속죄물로 죽으셔서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보고 "보따리 내 놓아라"고 해야 되겠습니까? 헌혈 죽어도 못해 라고 생각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도 그저 받은 목숨 감사하여 다른 물에 빠진 자, 다른 강도만난 자를 찾아 구출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니까 사랑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 중심으로 이웃이 아니라, 예수의 영으로 이웃이 되어 주는 겁니다. 예수의 영이 있으면 강도당한 이웃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이제 이웃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본문 끝에 보십시오. 주님은 이제 “너는 이와 같이 하라. 가서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설교 듣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너의 이웃을 찾아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포이에이’로 현재 시제입니다. ‘계속 행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이 개념을 깨달은 것을 넘어서서 실제 네 이웃을 지속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이웃을 중심으로 살아가며 이웃 속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내 몸을 아끼듯 이웃을 아끼라는 것입니다.(‘사랑’의 원어-‘아카페오’ ‘필레오’는 모두 동사형이다. 곧 사랑이란 추상명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게 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제부터는 지체들을 만날 때도 그냥 악수하지 마시고 사랑이 묻어 나온 악수를 하십시오.(독립군 악수, 감옥에서의 아수는 일반적인 악수가 아닙니다. 포옹을 한다든지 왼손으로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악수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고난 받는 이웃들에 대해서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십시오. 기도를 하되 그 사람의 심정에 들어가 같이 기도하십시오. 창세기에 하나님은 인간에 두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리고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 주님은 오늘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네가 돌봐야 할 이웃은 어디있느냐? 누가 그들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웃을 찾아내어라” 이웃이 되어 주어라. 너의 가족들에게 이웃이 되어주어라, 너의 교회 지체들에게 이웃이 되어 주어라. 네가 싫어하는 정당, 정치인도 이웃이 되어 줄 각오를 해야 한다. 네가 싫어하는 민족, 국가도 이웃이 되어줄 결심을 해야 한다.
  이웃이 되겠느냐, 이웃이 되겠느냐, 이웃이 될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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