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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선얼 처치 오해와 새로운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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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경진 작성일20-03-31 18:42 조회5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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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선얼 처치에 대한 오해와 교회적 적용

 

-김동춘(SFC대표)-

 

 

미선얼 처치(선교적 교회)의 의미는 레슬리 뉴비긴에서 수많은 질문과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뉴비긴의 미선얼 처치는 한국교회에 잘못 이해되었고 잘못 적용되었다.

뉴비긴은 뼈 속까지 선교사라고 불리운 선교사였다. 그가 인도에서 35년 선교사역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와서 보니 영국의 본 교회는 선교지에 있는 미성숙한 교회들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선교가 필요하고, 복음으로 재정립되어야 하는 교회였다. 레슬리는 영국과 유럽에서 선교는 고사하고 교회가 교회 자체의 의미를 잃어버린 모습을 보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래서 영국교회 안에 선교적 교회의 환원과 선교적 DNA를 신학적으로 인식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의 사명은 이미 사명과 소명을 잃어 버린 문화적 교회를 복음적 교회로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교회가 선교적 정체성의 가지고 사회와 문화의 모든 영역에 다시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배경으로 미국 교회들을 중심으로 미선얼 처치(missional church)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 운동의 원래 명칭은 복음과 문화 네트웍’(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이다. 즉 복음이 오늘날 세속화된 다원주의 문화 안에서 어떻게 그 영향을 들어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1. 미선얼 처어치의 오해 누구를 대상해야 하는가?(타켓의 문제)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발생했다. 그의 주장은 본래 교회자체가 선교사, Missionary Church였다. 그런데 이 주장이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강한 도전적 구호가 완화되어 형용사로 대체된 Missional Church 로 변형 되었다. 문제는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이를 새로운 의미의 교회형태로 변개시켜 사용하여 Social Mission으로 만들었고 다시 Community Church로 중화시키는 모순을 낳았다.

한국교회에서도 선교의 보편화, 사회화가 되면서 정작 교회가 감당해야 할 선교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 갔다. 선교는 지상명령 그대로 가는 것모든 민족에 기본적 초점이 맞추어 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해외, 지역을 넘는 개념이다. 물론 영역의 확대, 대상의 확대가 필요하다. 문화선교, 학원선교, 사회선교, 낙도선교, 장애인선교 등 선교를 넓혀야 한다. 하지만 교회가 사회에 다가가 울타리를 허물고 사회 문화선교를 하지만 선교의 핵심은 타문화권 선교이다. 즉 선교라는 말은 무성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교는 작아져 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선교라면, 아무 것도 선교가 아니다~!"(보쉬)는 말이 있다. 선교는 선교이다. 뉴비긴의 정의에 의하면 선교는 타문화권이다. 구체적으로 다른 언어문화를 가진 자에게 다가가는 것이 선교이다.

필자도 예전에 많이 주장했지만 요즘 반성하는 말이 있다. 조금 힘들면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어야지!’ 농사짓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전문화되어야 하는지 몰라서 한 말이다. 마찬가지로 삶이 곧 예배이다’ ‘노동이 곧 기도이다라는 말을 많이 했는데 반성한다. 삶과 노동을 강조했지만 사실 예배와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예배가 삶이다, 기도가 곧 노동이다는 말은 잘 안하면서... 예배를 삶처럼 자주 드릴 수는 없을까? 기도를 노동하듯이 할 수 없는가? 사실 기도하는 것이 노동하는 것만큼 어렵다. 예배를 삶처럼 드리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비지니스로 헌신하고자 하는 분들 가운데 간혹 "회사(일터)가 교회" 혹은 "사업 일이 곧 예배"라고 하면서 교회의 공적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것을 본다. 그런 분들 중에는 예배에 빠지는 것에 아무런 부담을 가지지 않을 뿐 아니라 정기적으로 혹은 꼬박꼬박 지역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조금은 무지한 것처럼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이 문제이다. 아무리 포스트모던한 사회가 되고 일터와 일상적 삶이 중요하고 심지어 가정이 중요할 지라도 교회는 교회이다. 가정이 어떻게 교회를 병행할 수 있는가? 교회는 교회, 예배는 예배, 기도는 기도이다. 마찬가지로 선교는 선교이다!

그런 점에서 미선얼 처치, 선교적 교회라고 했을 때 1차적인 주 관심은 선교에 있다. 그 선교는 주로 타문화권, 특별히 언어가 다른 타문화권에 대해 초점이 가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미 타문화권에 노출되어 있다. 아니 타문화권이 교회의 바운더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 눈말 돌리면 외국인근로자, 외국인유학생들이 있다. 선교지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작년 통계에 의하면 국내 체류 외국인 수는 총 인구의 3.5%에 해당하는 170만명이다.미전도지역의 사람들이 우리 옆에 와 있는 것이다. 열방의 미전도종족을 입양하던 한국교회 뒷마당에 입양대상인 그들이 자발적으로 와서 서성거리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이제 선교지이다. 선교적 교회는 전방, 후방이 따로 없다. 해외의 타문화권, 국내의 타문화권을 넘나드는 선교의 중심에 교회가 있다. 바로 안디옥교회처럼...

안디옥교회는 선교의 본부이자 최전방이었다. , 후방이 따로 없고 피아가 구분없다. 미선얼 처지(선교적 교회)론이란 더이상 선교는 '선교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교는 초대교회의 상황처럼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유대와 땅 끝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처음 선교운동이 일어났을 때와 달리 교회가 범세계적으로 존재하는 현 상황속에서 선교는 교회가 있는 곳에서는 교회대로, 파송된 선교사는 선교사대로 동시 다발적으로 선교를 해야 한다.

 

2. 미선얼 처어치의 오해 누가 주체인가?

한국 교회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많은 선교비를 -어떤 교회는 교회의 예산 중에 70%를 지출하는 교회도 있다- 지출하면 선교적 교회라고 생각한다. 알고 보면 선교지향하는 교회인 것이다. 물론 그것도 엄청 귀한 일이지만 교회에서는 구색을 맞추듯 선교가 진행되는 것을 보게 된다. 선교헌신예배에 가보면 선교헌금을 위한 헌신예배이다. , 선교는 교회의 외적인 활동 중 하나인 것이다. 교회 그 자체 안에 들어오진 않는 것이다. 신학교는 선교사역을 신철신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았지 교리의 핵심으로는 가르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선얼 처지는 선교지향하는 교회를 넘어선다. 선교적 교회, 더 나아가서 뉴비긴은 교회 자체가 선교사(Missionary Church).”라고 말했다. 미선얼 처치는 Missionary Church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선교하는 교회가 아니라, ‘선교사 교회미서너리 처어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선교사라는 말은 집사도 장로도 심지어는 목사도 선교사이다. 신학교도 선교사배출소이다.

필자가 중국에서 추방되고 난 후 노회나 총회에 자주 참석하게 되었다. 어떤 목사님은,

목사님, 선교사가 노회에 왜 자주 오세요?^^”

, . 목사님! 저는 추사(추방된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사역지를 찾고 있습니다.”

아니, 목사님, 선교사가 부름받은 이상 선교지에 뼈를 묻어야지. 한국 땅에 왜 있습니까?”

아니, 목사님! 왜 저만 선교하라고 하십니까? 목사님은 왜 선교사가 되면 안됩니까? 이제 목사님이 가셔야죠?”---라고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 분은 저에게 항상 갑이셨다^^)

선교의 주체는 교회이고, 교회의 구성원은 곧 선교사이다. 선교는 파송된 선교사가 주체가 아니라 교회 자체가 주체이다. 교회의 주체는 성도라 했을 때, 교회의 구성원들이 곧 선교사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가는 선교사, 보내는 선교사라는 말도 있지만, 더 본질적으로 모든 증인이 선교사(1:8)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내는 선교사라 할 때에도 나 대신 누구를 대신 떠나보내고 최소한의 뒷감당을 하는 소극적인 헌신자가 아니라, 해외 선교지와 나대로의 선교지인 지역사회를 모두 품는 적극적 헌신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세계를 품고 또한 내가 속한 지역사회의 선교지도 품어야 하는 것이다.

요즘 ’ ‘이라 해서 비즈니스선교에 새 지평이 열리고 있다. Business As Mission! 그런데 여기에 한 글자가 더 추가되면 좋겠다. Mission이 아니라 Missionary!

그래서 Business As Missionary가 되면 좋겠다. 선교의 주체가 분명해 지면 좋겠다는 것이다. 또한 학생선교사 샘(Student As Missionary), 주부선교사 햄(Housekeeper As Missionary), 한국담임목사 선교사 팸(Pastor As Missionary)의 인식전환이 일어나면 좋겠다.

 

3. 나오며

선교에 대한 집중이 필요하다. 새로운 돌파가 일어나야 한다. 새포도주를 향해서 낡은 부대를 과감히 뜯어고치는, 그릇 따지지 말고 그릇 속에 보물인 진주를 전하기 위해 과감한 그릇 교체를 단행하자.

교회라는 그릇이 주님의 복음인 진주를 드러내는데 관심과 집중이 일어나면 좋겠다. 복음을 어떻게 저들에게 전할 것인가? 특히 언어가 다른 타문화권에게 전할 것인가? 거기에 온 신경이 집중되고 퍼져나가는 교회, 그것이 바로 미선얼 처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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