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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 잘 죽어야 한다 -손문,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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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경진 작성일20-03-31 16:59 조회4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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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나 대만, 한국과 북한 세계에서 이데올로기로 분단된 나라들이다. 근대사에서 있어서 이들 나라들의 지식인이나 애국자는 양쪽으로 갈라져 서로 적대시하거나 백안시하였다. 그러다 보니 그들 후손들이 정부를 세운 지금까지 근대사의 인물이 이편과 저편에서 다르게 취급받고 있다. 예를 들면 윤봉길은 한국에선 애국자 서열 1-2위 이지만 북한에선 상해임시정부에 속했다는 것으로 백안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항일연군에 속했던 많은 항일운동가들이 사회주의 계열이란 이유로 한국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두 쪽 다 영웅으로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 있다.

먼저 한국과 북한에서 모두 인정받고 있는 항일운동가는 안중근이다. 왜 안중근은 두쪽 모두 최고의 항일운동가로 인정받고 있을까? 아직 해외정부나 항일무장세력이 형성되기 전 거사에 성공했고 순국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말하는가? 죽을 때 잘 죽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대만에서도 모두 인정받고 있는 국부가 있는데 바로 쑨원(孫文, 손중산 1866~1925)이다. 쑨원은 단순한 지사가 아닌데 국부로 모두 인정받는 것은 드문 예이다. 국민당과 공산당, 손문은 분명히 한쪽을 지지하거나 한쪽을 비판했을 텐데 어떻게 양 쪽 다 국부로 인정받고 있을까?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쑨원은 대총통에 올랐다. 하지만 쑨원은 그다지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안스카이에 자리를 넘겨줬고 그는 정치적 실패를 거듭하다 1925년 60세의 나이로 베이징에서 숨을 거둔다. 베이징 근처에 있는 삐윈스에 잠시 머물다가 난징으로 옮겨졌다. 한 순간의 성공 밖에 없는 그이지만 중국인들은 그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준다. 중국 대도시에 가면 빼놓지 않고 만날 수 있는 곳이 하나 있다. 바로 쑨원의 호에서 따온 ‘중산(中山)공원’. 왜 중국에서 얻어맞는 문제를 해결해 준 마오쩌둥이나 배고픔을 해결해 준 덩샤오핑이 아니라 쑨원을 기념하는 공원이 생겼을까. 이런 의문은 난징(南京)에 있는 중산릉에서 절정에 달한다. //묘의 중심지까지 반시간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도 놀랍지만 ‘중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의 묘를 전제주의 왕들의 묘를 지칭하는 릉(陵)이라고 부른 것도 특이하다. 이밖에도 쑨원의 고향인 샹산(香山)을 중산으로 바꾼 것을 비롯해 고향인 광둥(廣東)성의 성도인 광저우의 중산기념관과 비는 물론이고 상하이, 베이징에서도 그가 거쳐간 곳을 기념 숭배하는 분위기가 짙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국민당이 세운 대만에서도 쑨원은 국부로서 기념관과 공원에서 추앙받고 있다는 점이다. 쑨원에게는 정치적으로 어려움이 계속됐다. 이것은 그의 삶이 상당부분 국민당과 공산당이 겹쳐지는 부분에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가 세운 황포군관학교는 국민당은 물론이고 공산당 장교들의 토대가 되었고, 학교 내부는 국민당의 실질적 지휘자인 장쩨스가 주역이었지만 서서히 발원하는 공산당의 활동무대이기도 했다. 그는 특히 공산당과 국민당 어디에도 확실한 지지를 남기지 않았다. 거기에다 '새로운 중국' 수립에는 맨몸으로 중국 건국을 끌어가던 쑨원의 정치적 자산이 필요했다. 결국 서로 쑨원이 자신들의 정치 사상을 지지한다고 믿은 두 세력은 각각의 쑨원을 만들어냈다. 쑨원은 동서인 짱제스와 의견이 맞았지만, 국민당과 연계된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중국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자,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소련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반제(反帝)·반군벌 싸움을 벌이기 위해서는 러시아 혁명을 본받아 국민당을 개조한 뒤, 공산당과 제휴(국공합작), 노동자·농민과의 결속을 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는 죽음 직전까지 정확한 정치적 입장을 피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당도 그를 추앙했다. 사망 당시 국민당이 장례를 준비했지만, 레닌이 그를 위해 관(棺)을 보내는 등 예우한 것만 봐도 그의 위상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의 부인인 쑹칭링이 그의 사망 후 국공합작을 이끌고, 항일전쟁을 선도한 후 공산 중국의 성립에 큰 역할을 한데다 국민에게 덕망이 높아 중국에서 쑨원의 위상도 그 만큼 커졌다. 한편 동서인 장개석과 그의 아내 쑹메이링은 쑹칭링의 자매로서 완전히 다른 두 길을 걷게 되었지만...

결국 사망시점이 중요한 것이다. 그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완전히 결별하기 전인 1926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양쪽다 쑨원이 자기 편이었을 것이라고 동상이몽하게 만든 것이다. 결국 죽을 때를 잘 분별한 것이다.

사람은 죽을 때를 잘 분별해야 한다. 죽을 때 행복해야 한다. 생전에 큰 일을 한 분이 죽기 싫어 발버둥치다가 즉, 자신이 죽을 때 죽지 않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 추해진 많은 사람을 본다. 이번 대선 때도 이리 저리 당을 옮겨다닌 사람이 바로 그런 유형일 것이다. 많은 목사님들이 은퇴 과정에서 은퇴 이후에 추해지는 것을 본다. 떠나는 것을 잘애햐 하는데도... 박수칠 때 떠나라고 했다. 박근혜대표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박정희 육영수 두 분이 총으로 이 세상을 비참히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박정희가 이승만처럼 반정부시위로 물어났더라면 그의 딸이 몇 년 뒤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우리도 잘 죽자, 잘 물러나자, 예수님처럼...

(* 쑨원 삶의 단편을 들여다 보자. 그는 1866년 11월 광둥성 샹산(香山-현재의 중산(中山))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이 하와이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해 서구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그는 서서히 혁명가의 기질을 갖기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이 미신으로 숭배하는 북제묘(北帝廟)와 신상(神像)을 파괴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쑨원은 이후 의학을 배워 의사로서 명성을 높였다. 그가 혼란에 빠진 중국 정치계에 이름을 올린 것은 1896년 10월 런던 ‘청나라 공사관 감금 사건’ 때문이다. 그는 한 해 전 광저우(廣州)에서 봉기를 일으키다가 실패해 미국을 거쳐 영국에 갔다가 스스로 청나라 공사관으로 들어가 갇히는 꼴이 된다. 다행히 컨트리 경의 구명운동과 ‘더 글로브’지가 ‘중국 혁명가가 런던에서 유괴, 공사관에 감금되다’라는 특종을 터트리는 바람에 석방되어 편안하게 서구사상을 공부할 기회를 갖게 됐다. 1894년에는 하와이로 건너가 중국 부흥을 의미하는 흥중회(興中會)를 건립하는 등 수차례 중국 부흥을 기도했다. 이후에 다시 중국에 돌아가 앞에서 말한 봉기를 일으키다가 실패, 감금, 석방을 거듭하면서 명사가 됐다.

그는 런던 공부중에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구상했다. 중국을 천년의 전제에서 해방하고, 만주족의 지배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민족과 민권, 민생, 이 세 가지를 혁명을 통해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혁명의 동지로 일본을 상당히 중시했다. 그는 일본인들과 합작해 다시 봉기를 준비하고, 보황파(保皇派-청조를 옹호하면서 그 체제 속에서 개혁을 하자는 파)인 캉요웨이(康有爲) 등과 접촉해 혁명을 모색하지만 서태후의 ‘무술정변’으로 인해 타격을 받고, 모두 쫓기는 신세가 된다. 1900년 쑨원은 청나라 거물 리훙장(李洪長)과 합작을 시도한다. 하지만 리훙장이 북양대신(北洋大臣)이 되어 올라가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간다. 그는 다시 세를 모아 후이저우(惠州)를 기점으로 무력봉기를 일으킨다. 하지만 일본의 지원철회 등으로 인해 실패하고 만다.

이후에도 그는 여러 가지 노력을 하다가 1905년 일본으로 들어가 8천명에 이르는 유학생들을 천천히 규합한다. 그는 일본 유학생 세력과 힘을 규합해 ‘중국혁명동맹회’를 만들고, 각종 홍보활동과 조직활동을 서두른다. 또 먼저 귀국한 이들이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킨다. 하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1911년 10차 봉기인 황화강(黃花岡) 봉기가 실패하지만 중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쑨원의 이름은 높아갔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중국은 급속히 변혁의 시대에 들어간다. 국제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쑨원은 1911년 크리스마스에 상하이로 돌아옴으로써 화려하게 중국 정치의 전면에 자리한다. 청조의 몰락은 이제 불을 보듯 뻔했지만 중국을 삼키려는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움직임도 기민했다.

이 와중에 쑨원은 상하이에 도착한 지 4일 후인 12월 29일 난징에서 열린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로 대총통에 당선된다. 1912년 1월 1일에 쑨원을 대통령으로 한 중화민국이 탄생한 것이다. 베이징에서는 연일 비상회의가 열렸고 실질적인 권력자였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혁명군과 협의 하에 청조를 몰락시키고, 대신에 쑨원으로부터 임시 대총통직을 물려 받았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선거에서 승리한 국민당의 당수 쑹자오런(宋敎仁)을 암살하고 황제로 등극하려는 야심을 보였다. 쑨원은 다시 봉기를 일으켰지만 실패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쑨원은 일본과 중국에서 새로운 세 모으기를 지속했고, 장쩨스(蔣介石) 등이 이 모임에 참여했다. 그리고 위안스카이의 야망은 지속될 수 없었다. 광둥 등 남방에서 몰고간 반원(反袁)은 확장됐고, 그의 지지자였던 군벌(軍閥)들이 하나 둘 손을 놓자 위안스카이는 절망했고, 1916년 6월 5일 숨을 거둔다. 쑨원은 다시 힘을 모았지만 차츰 각 지역에서 군림하던 군벌의 성장으로 인해 좌절할 즈음인 1919년 ‘5.4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중국에 대한 야심을 불태우던 일본에 대한 경계심도 커갔다. 하지만 쑨원에게는 정치적으로 어려움이 계속됐다. 그는 국민당은 물론이고 공산당 장교들의 토대가 된 황포군관학교를 세워 힘을 모았다. 학교 내부는 국민당의 실질적 지휘자인 장쩨스가 주역이었지만 서서히 발원하는 공산당의 활동무대이기도 했다.

쑨원은 부인 쑹칭링(宋慶齡)등과 더불어 일본 국민에 불평등한 조약을 직접 호소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고, 베이징도 방문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 지병이 악화됐고, 1925년 3월 12일 간장암으로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그는 시양산 삐윈스에 안치되어 있다가, 1926년 6월 1일 난징 중산릉으로 무덤을 옮겨졌다.

쑨원의 인생은 실패로 거듭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대만은 물론이고 공산 중국에서도 영웅이 된 것은 공산당과 국민당 어디에도 확실한 지지를 남기지 않은 이유 때문이다. 거기에다 '새로운 중국' 수립에는 맨몸으로 중국 건국을 끌어가던 쑨원의 정치적 자산이 필요했다. 결국 서로 쑨원이 자신들의 정치 사상을 지지한다고 믿은 두 세력은 각각의 쑨원을 만들어냈다. 쑨원은 동서인 짱제스와 의견이 맞았지만, 국민당과 연계된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중국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자,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소련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그는 군벌 뒤에 제국주의가 있다는 것과, 인민들과 단결하여 반제(反帝)·반군벌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러시아 혁명을 본받아 국민당을 개조한 뒤, 공산당과 제휴(국공합작), 노동자·농민과의 결속을 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는 죽음 직전까지 정확한 정치적 입장을 피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당도 그를 추앙했다. 사망 당시 국민당이 장례를 준비했지만, 레닌이 그를 위해 관(棺)을 보내는 등 예우한 것만 봐도 그의 위상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의 부인인 쑹칭링이 그의 사망 후 국공합작을 이끌고, 항일전쟁을 선도한 후 공산 중국의 성립에 큰 역할을 한데다 국민에게 덕망이 높아 중국에서 쑨원의 위상도 그 만큼 커졌다. 살아 생전에 별다른 영화를 누리지 못했지만 그는 죽어서 ‘중산릉’이라는 절대 군주시대의 묘명(墓名)을 갖는 등 ‘중국 건국의 아버지’로 숭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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